https://naver.me/FvEo9CFJ
유엔군 군목·임한상 목사 등
목숨 걸고 예배·성경 공부 인도
6000여명 회심·2200여명 세례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8월 7일 미국 특파원들과 인터뷰하고 있다. 오른쪽은 미 제24사단 제19연대 군인이 1951년 3월 7일 서울에서 생포한 중공군의 몸을 수색하고 있는 모습.
1953년 6월 18일부터 19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중 포로가 된 북한 출신 병사 중 반공포로에 대해 석방을 단행했다. 반공포로들은 한국군 경비병의 묵인과 협조로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 8개 포로수용소 3만5698명 가운데 2만7389명이 탈출했다. 당시 우리 국민은 포로들에게 음식과 숙소, 옷가지를 제공했고 집에 숨겨주기도 했다. 국제법상 전쟁 포로는 임의로 석방할 수 없음에도 이 대통령은 미국의 동의 없이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통일을 원하는 국민적 열망과는 정반대로 전쟁을 속히 끝내려는 미국에 압력을 넣어 미국과 거래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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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군목·임한상 목사 등
목숨 걸고 예배·성경 공부 인도
6000여명 회심·2200여명 세례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8월 7일 미국 특파원들과 인터뷰하고 있다. 오른쪽은 미 제24사단 제19연대 군인이 1951년 3월 7일 서울에서 생포한 중공군의 몸을 수색하고 있는 모습.
1953년 6월 18일부터 19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중 포로가 된 북한 출신 병사 중 반공포로에 대해 석방을 단행했다. 반공포로들은 한국군 경비병의 묵인과 협조로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 8개 포로수용소 3만5698명 가운데 2만7389명이 탈출했다. 당시 우리 국민은 포로들에게 음식과 숙소, 옷가지를 제공했고 집에 숨겨주기도 했다. 국제법상 전쟁 포로는 임의로 석방할 수 없음에도 이 대통령은 미국의 동의 없이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통일을 원하는 국민적 열망과는 정반대로 전쟁을 속히 끝내려는 미국에 압력을 넣어 미국과 거래하기 위함이었다.